
주일예배 설교
20250216(주일) 누가복음 강해 5
눅 1:57-66 세례 요한의 출생
서론) 첫 아이를 낳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어찌 보면 그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오는 날이 바로 첫 아이가 태어난 날일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가 없으면 갖지 못할 여러 경험들을 하게 되니까요. 우리에게 찾아온 생명을 환영하고 돌보면서, 부모로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람으로 우리 인격은 더 성숙하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을 환영하고, 그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불임으로 노년에 재생산의 소망이 없는 부부에게, 그리고 정혼한 처녀를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P)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 아이가 태어날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나요? 뉴라이프교회에 영적인 생명이 탄생할 때에, 잃어버린 영혼이 주께 돌아올 때에, 우리가 어떤 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본론) 첫째로,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57-5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P)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엘리사벳의 출산은 엘리사벳과 일가친척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이미 사가랴에게 예언한 바 있지요. P)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14절). 이 천사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은 공동체에 큰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작년 4월 중순에 연서가 태어났습니다. 홍순형 형제와 한고은 자매 가정에 허락하신 생명이지만, 동시에 우리 교회 공동체에 허락하신 축복이지요. 예배 후에 연서가 매주 자라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성도들이 계시더군요. 새로운 생명은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축복이 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기까지 산모와 가족들은 큰 수고를 감당해야 하지요. 주변에 아이를 갖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고, 유산의 아픔을 경험한 경우도 있고, 출산 이후 본인의 건강을 해친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지금은 출산하면서 목숨이 위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는 생명을 낳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도 아이를 낳은 해산의 고통은 어머니들에게 큰 댓가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산모가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하면 그 해산의 수고를 잘 감당한 아내가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운지, 무엇이든 해 주고 싶고, 가족들에게 건강한 출산은 큰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지난 주에 교회사에서 마리아는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왔다고 말씀드렸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는데 동정녀 마리아가 임신과 해산의 수고를 감당한 것처럼, 교회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임재하시고, 예수님의 생명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명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에는 새 생명을 품고 새 생명을 낳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육신의 새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도 있어야 하겠지만, 젊은 부부가 아니라면 새 생명을 낳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새 생명을 품고 낳는 일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덮으실 때에 영적 새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생명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해서 아이가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고자 할 때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교회는 생명의 역사로 인한 기쁨과 감격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신앙 생활을 수십년 했는데 나로 인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구요? P)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엘리사벳의 임신과 출산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구약 성경에는 엘리사벳 말고도 자연적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어머니가 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니다. P)90세에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있었구요(창 18:10-14, 21:1-7). P)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쌍둥이를 임신하게 하셨습니다(창 25:21-22). P)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라헬도 오랫동안 아이가 안생겨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고 마침내 요셉을 얻었습니다(창 30:22-24). P)삼손의 어머니도 임신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후에 삼손이 태어났고(삿 13:1-3), P)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불임으로 괴로와하며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마침내 아들을 얻었습니다(삼상 1:1-20).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께서 우리 뉴라이프교회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십시오. 주께서 당신의 거룩한 역사를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면 기꺼이 주께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결실로 새 생명의 탄생을 기대하십시오. 새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우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생명이 태어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우리가 전도할 대상자를 마음에 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 10명 중에 8명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1명은 과거에 교회에 출석했으나 현재는 교회를 안나가는 “가나안” 성도입니다. 우리에게 만나게 하시는 이름들을 품고 목장에서 함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해 새 생명을 낳고 이 일에 동참하는 성도들에게 새 생명의 탄생으로 인한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 명씩 전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두 사람이라도 새로운 교우들이 생기면 새 생명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고 애쓴 우리 모두는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올해 이목동에서 새 생명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둘째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위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59-61절 함께 읽겠습니다. P)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름을 지으려고 가족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 때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이름 사가랴를 아이에게 붙여 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이름에 항렬을 사용해서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기도 하지요. 하지만 20세기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Jr.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서양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이고 그 옆에 Jr.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이나 가족 친지 중에서 좋은 이름을 골라 아이에게 붙여주었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P) 그런데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짓겠노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자기들이 알기로는 집안에 이런 이름이 없는데… 그래서 한동안 말을 못하고 있는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아이 이름을 무엇으로 짓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서판에다 아버지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아이의 어머니 뿐 아니라 아버지도 이 이름을 선택한 것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세에 편승해서 살아갑니다. 사회 생활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눈치가 빠르고 대세를 따르는 것이 사회 생활을 잘 하는 비결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발전하기 전부터 사람들의 여론, 혹은 민심은 개인의 판단과 행보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가족들이 사가랴라고 하자고 하면 그렇게 이름을 지으면 무난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겠지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까요. 이미 엘리사벳이 임신하기 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P)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요? 원래 히브리어로는 요하난의 헬라식 음역인데 P) ‘야훼께서 은혜로우시다’는 의미입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명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로 태어날 아이 요한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문에 전례없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러셨지요. 나시기 전에 마리아와 요셉에게 각각 “예수”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천사를 통해 명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은 대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요즈음 세상은 정치적으로 보수냐 진보냐, 좌파냐 우파냐 정치적 입장을 정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 누구를 욕해보라고 하는 등 그런 질문들을 한다고 하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그러한 행태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치는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적 입장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업으로 사명으로 정치에 참여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P)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분임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은혜로우시구나 알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인 것입니다. P)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됩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요한의 정체성은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사가랴에 천사를 통해 받은 아들의 이름을 지켜냄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가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가 여부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 바른 정체성을 갖추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정체성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셋째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는 경외감과 기대를 불러일으킵니다. 64-6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P)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9개월 동안 닫혔던 입이 풀리고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사가랴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드디어 징계의 시간이 끝나고 천사를 통해 주신 예언의 성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P)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P) 새로운 이름이 지어지자 그의 입술에 P) 새로운 찬양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찬양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함께 묵상해 볼 것입니다. 이 아이가 노년의 제사장 부부에게 태어난 사실에 더하여, 아버지 사가랴가 아이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면서 입이 열리고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유대 산골에 큰 뉴스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제사장 사가랴를 연단하시고 아들 요한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 아이 요한이 장차 어떠한 아이가 될 지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뉴라이프교회를 통해서 어떠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까요? 사가랴는 경건한 제사장이었지만, 생명 잉태의 기적을 예고하는 천사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이 현실이 되는 9개월 동안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징계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성취와 함께 입이 열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불신의 입술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입술로 변화되었습니다. P) 우리 불신과 불평과 원망의 입술이 닫히고 감사와 찬양의 입술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이 다 안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안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뉴라이프교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교회라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고질적인 피부병이 있어서 오랫동안 함께 기도했는데 몇 년을 괴롭히던 그 피부병이 이제 깨끗하게 나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부임하고 뉴라이프 교회에서 기도함으로 치유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개인적으로 간증한 일곱 번째 사례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가 필요한 분들이 여러 분 있습니다. 모일 때마다 환우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가운데 생명의 태가 열리고 찬양의 입술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의 현장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이 말씀으로 성장하는 영적 모태가 교회입니다. P)올해 우리 교회에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환영하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이름에 걸맞는 정체성을 갖춘 뉴라이프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P)새로운 정체성은 하나님께 순종함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름을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순종으로 지켜내시기를 축복합니다. P)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실 새 생명의 역사를 기대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겨자씨처럼, 생명의 역사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뉴라이프교회 되기를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목 | 성경말씀 | 설교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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