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어떤 왕을 기대하십니까?
2025-04-13 20:00:57
김상윤
조회수   24

20250413(종려주일) 

눅 19:29-42 어떤 왕을 기대하십니까?

 

서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고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 이름한 것은 P)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요 12:3).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는 관습은 이미 이집트에서도 있었지만, 유대 민족에게는 예수님 때로부터 약 2세기 전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시리아의 정복자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을 때에 참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돼지를 성전 제단에서 희생 제물로 드리고 그 피로 성전을 더럽힘으로 유대인들을 모독했습니다. P) 그 때에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을 중심으로 독립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마카비 혁명이었습니다.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 유다가 특히 용맹하여서 사람들이 그를 쇠망치 ‘마카비’라 불렀는데 그 별명이 유다 독립 전쟁의 별칭이 되었습니다. 무력 항쟁 3년만인 기원전 164년에 드디어 에피파네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하여 새로운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 때에 해방군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들을 열렬히 환영할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승리와 번영, 평화와 기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종려주일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백성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흔히 떠올립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본문을 보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에 가까이 오셔서 우셨다고 합니다(41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기뻐하고 있는데 정작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신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누가 우리 왕을 울게 만들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종려주일에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우리 왕은 어떤 분이실까요?

 

본론) 첫째, 예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는 순종의 왕이십니다. 예루살렘 입성 사건에는 순종의 모습이 켜켜이 나타납니다. 먼저 두 제자의 순종입니다.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P)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제자 중 둘을 보내어서 맞은편 마을, 베다니 혹은 벳바게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 오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면에서 난감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 하필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인가? 기왕이면 사람을 태우는데 익숙한 잘 길들여진 나귀나 말이면 좋을텐데. 말을 타면 훨씬 더 폼나고 멋질텐데…또 나귀 주인 허락을 받고 풀어와야지 그냥 풀어오면 절도가 아닌가? 나귀 주인과 미리 이야기가 다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왜 예수님은 이런 비상식적인 지시를 하시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머릿 속에 떠오를 여러 생각들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사람들의 상식과 어긋난 말씀과 행동을 하시곤 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적 관습과 전통에 익숙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게 반감을 사곤 하셨습니다. 영적인 가르침을 위해서 종종 선을 넘는 언행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P)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판단에 능하다보면 영적인 관점을 놓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다가 내 생각과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에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시 57:2)의 뜻이 무엇일지 여쭈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종종 혼란스럽고 당황스런 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결정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하면 안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P)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31절). 우리말로는 P) “주가”로 짧게 번역되었지만 헬라어로는 P) “바로 그것의 주인(ὁ κύριος αὐτοῦ 호 퀴리오스 아우투)”입니다. 그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창조주이시니까요. 우리가 사적으로 무엇을 소유했든지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 필요와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소유를 잠시 위탁받은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권을 종종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위탁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시고 언제든지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우리 재산, 우리 건강, 우리 인간관계, 우리 생명조차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말씀하신 맞은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느 집에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그 나귀의 주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이 뻔뻔한 행동에 대해 항의합니다. P)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P)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이 한 마디에 더 이상 질문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나귀 주인들은 기꺼어 나귀 새끼를 내어 주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나귀 주인들의 순종이 두 번째 순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데려온 나귀 새끼를 타고 감람산 내리막길에서 예루살렘 오르막까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가 어떻게 끝까지 예수님을 태울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무게가 많이 무겁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태우고 걷는 일은 익숙치 않아 힘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없는 나귀는 묵묵히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힘든 순종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순종, 두 제자, 나귀 주인들, 나귀의 순종은 결국 예수님의 순종으로 수렴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것은 결국 메시야로서 당신을 위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는 순종의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메시야 스크립트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P)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 이 말씀의 성취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P)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 12:14-16). 복음서 여러 곳에서는 예수님의 삶 자체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마 1:22-23, 2:5, 2:15, 마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14-15, 13:35, 21:4-5, 26:31, 27:9-10; 막 1:2-3, 14:27; 눅 3:4-6, 4:17-21, 22:37; 요 12:14-15, 12:38, 13:18,  15:25, 19:24, 19:28-29, 19:36, 요 19:3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동기로 말하고 행동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시는 주님께서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순종의 왕이셨습니다. 두 제자처럼, 나귀 주인들처럼, 나귀 새끼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성취하시는 순종의 왕에게 합당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관대한 왕이십니다. 37-3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P)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누가가 기록한 군중들의 찬양은 뭔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까? 아기 예수님 탄생하실 때에 들판의 목자들이 목격한 천군천사들의 찬양이 바로 그것입니다. P)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주의 이름으로 왕이 오신다고 기뻐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따르며, 또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시편 118편의 한 구절을 가지고 찬양했습니다. P)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9-10). 군중들은 다윗 왕가를 회복시킬 메시야로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호쉬아-나”라고 하며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시 118:25).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참 귀하다, 나도 저렇게 찬양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드시지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39절, 공동번역) 바리새인들이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칭하며 메시야로서 찬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반역이라는 정치적 오해를 불러 민족적인 위기가 닥칠 것을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 돌려야 할 수준의 찬양을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와 인기가 추락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고발할 때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내세운 죄명은 이러합니다. P) “…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몰아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P)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 19:14-15). 가이사 외에는 자신들에게 왕이 없다는 대제사장들의 말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는 유대교 신앙고백에도 어긋난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정한 종교적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철없는 제자들을 꾸짖으라고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P)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그들의 환호와 찬양소리를 제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보기에 제자들의 모습은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군중들의 환호는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찬양 소리는 듣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심으로 당신을 영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기꺼이 맞추셨습니다. 열두 해 혈루병 든 여인의 미신적인 믿음의 행동에 응답하여 치유의 능력을 흘려 보내셨습니다. 집 천장을 뚫고 중풍병자를 내려보낸 친구들의 무모한 행동을 귀한 믿음이라 보시고 죄사함과 치유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 여겼던 세리 삭개오의 초대에 응하셨고 기꺼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낭비라는 제자들의 비난 속에서도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을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의 찬양을 제지하려는 이들에게, 온 천지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골몰하는 너희들은 찬양하는 돌멩이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예수님의 관대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타인을 판단하기보다 주님을 찬양하는데 마음을 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혹 판단해야 할 때에는 예수님의 용납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관대하고 너그러운 우리 왕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관대한 왕의 백성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41-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P)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가까이에서 보시고 갑자기 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지금 군중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 환호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 환호소리를 달가와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들의 속마음이 어떠한 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요 2:23-25).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했을 때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요 6:15).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늘의 양식인 당신을 먹으라고 설교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요 6:6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음을 아셨습니다(요 12:43).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다윗의 왕조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충실하셨습니다. 정치적 압제보다 경제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이름의 뜻이 ‘평화의 도성’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분쟁과 전쟁을 겪었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평화의 길, 회복의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P)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7-38). 결국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군중들 중 다수는 며칠 후에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따라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르짖었습니다(눅 22:21). 그들의 외침에 굴복한 빌라도는 결국 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주었습니다(눅 22:23-25).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잡힌 군중들은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져서 하나님의 아들을 마음으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군중심리에 기대어 예수님께 환호했던 그들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날 때에 서슴없이 예수님에 대해서 등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묵묵히 사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그 한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왕을 기대하십니까? 내 생각에 주님을 맞추려 하지 말고 성경 말씀에 나타난 주님께 우리 생각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겸손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 순종의 왕이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의 찬양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관대한 왕이십니다. 자비와 긍휼로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대속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셔서 이 땅에 참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고난 주간 순종과 관용과 평화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총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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