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설교
1. 네 종류의 밭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씨앗이 뿌려지는 밭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씨뿌리는 비유의 구조는 단순하고, 내용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예수님은 4종류의 밭, 길가, 바위(돌밭), 가시밭, 좋은 밭을 말씀하셨는데, 크게 분류해 보면, 단 2종류의 밭이 존재합니다. 열매를 맺는 밭과 맺지 못하는 밭입니다.
이 구분은 기계식으로 2:2로 나눠지지 않고, 좋은밭과 그렇지 못한 다른 3개의 밭이라는 1:3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또 다른 1:3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아예 열매와 상관없는 밭 아닌 것과 밭이나 밭과 비슷한 것으로 구분됩니다. 다시말해 완전 밭이 아닌 길가와 그래도 열매와 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는 3가지 밭, 바위(돌밭), 가시밭, 좋은밭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비유는 알레고리적(우화)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해석해 주셨는데,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밭은 곧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즉, 밭의 종류와 상태가 다른 것은 마음의 상태가 다른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럼, 간략하게 이 밭들에 대해 살펴 보시겠습니다.
첫번째, 길가입니다.
: 이것은 씨앗이 떨어짐과 동시에 새들이 날아와서 물고 가버립니다. 새먹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새를 마귀로 해석하시며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말씀과 구원의 관계성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근데, 분명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함으로써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순간성과 지속성입니다.
사랑의 고백은 순간이지요. 고백의 순간을 통해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순도는 어떻습니까? 긴 시간을 같이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삶을 통해 증명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지만, 그 믿음의 순도는 삶과 시간을 통해 입증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12을 통해 이렇게 구원을 위한 믿음의 삶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이처럼 지속적인 말씀의 자람을 통해 이루어 가야 합니다. 길가는 그것이 안되는 겁니다. 아예 시작조차 못하는 거지요. 자, 그럼, 여기서 말하는 ‘길가’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이건 아주 명료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배격하고, 아예 말씀 자체를 거부한 종교권력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른바 당시 종교계의 전문가들입니다. 율법전문가들, 예배전문가들입니다. 사회에서 ‘어흠’이라고 소리 꽤나 내던 전문가들이 예수님을 배격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다며 이단시하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훼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딱딱한 길가와 같은 마음으로 묘사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전문가인데, 내가 아는데!’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것이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굳은 마음 앞에 영어 접두사 ‘un’을 놓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요…
배웠던 것을 지우는 것, 의도적으로 잊는 것을 Unlearn이라고 합니다. 번역하자면, ‘반(反)학습’ 내지 ‘폐기학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 또는 혁신의 출발점은 새 것을 배우는 학습(Learn)이 아닙니다. 낡은 것을 버리는 반학습 내지 폐기학습이라는 Unlearn이 우선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축적해 있어 패턴화되고, 루틴화된 경험을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힘들게 배우고, 쌓아온 것을 굳이 왜 버려야 하지?’라는 질문이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지금까지의 논리와 경험을 죄다 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이론과 경험으로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예전 것을 고집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것들 중에 본질은 relearn 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Unlearn 하는 선별이 필요합니다.
두 차례 바로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빠짐없이 찾았던 곳 중의 하나가 피카소 박물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느꼈던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피카소는 기본 데생부터 시작해서 미술의 기본기를 탄탄히 배운 화가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피카소는 과거에 배웠던 것을 하나하나씩 버림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피카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평생을 일곱 살 아이처럼 그리려고 노력했다던 피카소가 즐겨 사용한 단어는 'naive(순진한)'나 'pure(순수한)'가 아니었습니다. 배운 것을 고의적으로 잊는 'Unlearn'이었습니다. Unlearn을 통해 Relearn하는 용기와 유연함이 있었기에 그는 피카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이들어가며 ‘여성은 부드러움을 잃어가고, 남성은 너그러움을 잃어간다’고 하지요. 어떤 이들은 그게 모두 호르몬 탓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혹시 나이 들어가면서도 새롭게 배우지는 않은 채 기존의 배운 것들, 축적된 경험만을 붙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이 너무 확고하여, 구부릴 수 없는, 굳은 상태인 ‘Inflexible’이 된 것은 아닐까요? … 한 주간을 돌아 보십시다. 여러가지 일들로 얼마나 마음이 굳어지셨습니까? 그렇다면, 굳어진 마음 앞에 ‘Un’을 놓아둬야 합니다. 그래야 ‘길가’라는 마음밭으로 전락되지 않습니다.
둘째, 돌밭입니다.
: 여기서 부터 일단 카테고리가 밭에 속합니다. 근데, 얕은 흙 안에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품고 있어 싹이 돋았지만, 더이상 자랄 수가 없어 시들어 말라버립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처음엔 기쁨으로 말씀을 듣지만,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흙이 얕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견디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된 것의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빈궁함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30:7-9에 아굴은 이렇게 기도했던 겁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경제적인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우리 믿음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지 않도록 재정을 잘 경영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원과 시간이 무한정이면 경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쓰고 싶을 때 그냥 쓰면 됩니다. 그렇지만, 한정된 시간과 자원이기에 필요한 곳을 위해 다른 곳엔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만일을 위해 예비할 필요도 있습니다. 모쪼록 많거나 없거나 간에 경제적인 부분이 우리 믿음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이 되지 않도록 관리해 가셨으면 합니다.
셋째, 가시밭입니다.
: 가시밭엔 흙은 풍부합니다. 싹도 내릴 수 있고, 자라기까지 합니다. 근데, 곡식보다 더 강력한 뿌리와 줄기를 갖고 먼저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던 존재가 있습니다. 가시떨기입니다. 그것이 곡식으로 하여금 더이상 자리지 못하게 합니다. 결실치 못한 채 계절이 종료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은 듣지만, 지내는 중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결국 염려, 재물, 향락이라는 것들이 신앙을 위협하는 위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3가지 시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 간다는 것은 필요와 욕심의 경계를 잘 관리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인지, 염려인지 경계를 파악하고 경계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재물인지, 과도한 욕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의 기쁨을 위함인지, 정도를 넘어선 쾌락을 위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을 구분하고,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2006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플라이 대디>는 일본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힘의 논리에 무력했던 40대 아버지가 딸의 폭행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단련함으로써 바뀌어 가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인상적인 대사가 있습니다.
"기초가 뭐라고 생각해?"
"기초는 ‘필요없는 것을 버리거, 필요한 것만 가지는 것’이야”
“그 기초를 만들기 위해 우선 부수는 것부터 해야해. 왜?”
……
"부수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어. 새로운 근육을 만들기 위해선 오래된 근육부터 부숴야 해"
새로워지고 싶다고 하면서 옛 것을 그대로 가진 채 새로워 진 경우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신앙인으로 바뀌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잘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독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 자신이 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이는 온갖 종류의 염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재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향락일 수 있습니다. 내가 자주 넘어지는 것, 그것이 내 맘 속의 가시덤불입니다. 그것이 나를 가시밭으로 머물게 합니다. 그것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 가시밭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어느 새벽, 시간을 보니 4시가 좀 넘은 때였습니다. 전화가 울렸습니다. 30대 아기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남편이 술에 취해서 밤새 위협적이라는 겁니다. 의사가 왕진가방을 챙기듯 성경을 넣고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니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는 남편이 저를 보더니 놀랍니다. 부부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술기운이 가득한 남편과 울음으로 얼굴이 부은 부인과 더불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나눈 말씀이 베드로전서 4:3이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 말씀을 읽고 간단히 이렇게 권했습니다. “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것은 ‘많이 먹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이제 마실만큼 마셨으니, 그만 마시라고 하십니다”. 감사하게도 그날 술기운이 가득했던 남편은 그 말씀을 전심으로 받았고, 자신 속에 있던 향락의 가시를 제거했습니다.
귀하신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그 어떤 가시가 나로 열매맺지 못하게 가로 막아 왔습니까? 이제 그 가시와 살았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하십니다.
넷째, 좋은 밭입니다.
: 좋은 밭은 열매가 30배, 60배, 100배가 맺히는 밭입니다. 크리스천이면 누구나가 선호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밭입니다. 그러나 이 밭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좋은 밭은 다음과 같은 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되는 구조를 가진 사람’입니다. 되는 구조로 자신을 바꾸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승부가 결정됩니다.
냄비밭을 잘 하는 사람은 늘 맛나게 잘 합니다. 근데, 설익은 밥을 만드는 사람은 늘 설익은 밥, 새까맣게 태운 밥을 만듭니다. 찌게를 아주 맛나게 끓이는 사람은 늘 맛나게 끓이는데, 짜고, 맵게 끓이는 사람은 늘 그렇게 끓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운이 좋거나 나빠서?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레시피, 구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8:15은 좋은 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 구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밭은 그냥 가만히 있어서 좋은 밭이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을 지키는 것, 그리고 인내를 갖고서 과정을 겪어가고,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런 구조가 30배, 60배, 100배 열매맺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앞서도 언급드렸지만, 사랑의 고백은 순간이지만, 사랑은 지속성을 통해 사랑임이 증명됩니다. 믿음의 고백도 순간이지만, 믿음은 지속된 삶 속에서 믿음임이 드러납니다. 열매는 씨앗을 심자마자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여정을 거치며 만들어 가는 산물입니다. 그래서 좋은 밭으로 남기 위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계속적인 관리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한 해 좋은 밭 되었다가 그 다음 해도 좋은 밭으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 해만 가꾸지 않아도 그곳이 논이었는지, 밭이었는지 그냥 풀밭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게 자연의 모습인데, 하물며 우리 마음은 예외이겠습니까? 끊임없이 뽑아내고, 갈아엎고,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 구조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2. 구조를 변혁하라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구조를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꾸는 것, 변화입니다. 변화는 ‘익숙함’과 결별하는 그 경계에서 일어납니다. 근데 이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과 ‘게으름’입니다.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변화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생사가 나눠지는 일에서 조차도 변화하길 주저합니다. 암환우들이 병과 싸우면서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공동체에서 여러 암환우들을 만났습니다. 각종 부위의 암으로 고통하는 그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암에 걸려서도 여전히 옛습관과 결별하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기존의 식습관부터 삶의 방식을 싹 버리고 완전 새롭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누가 건강을 회복하겠습니까? 이건 삼척동자도 알 일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나를 바꾸지 않고서는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딱딱한 길바닥 같은 완고함, 얇은 흙 아래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돌덩어리들, 깊이 뿌리 내리고 얽히고 섥혀있는 가시들과 결별하지 않고서는 변화는 말잔치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변화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한 농부처럼 되어야 합니다. 농부는 최선을 다해 농사짓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한해의 농사를 위해 적당한 비와 바람등 기후적 조건을 위해 하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와 영적성장에도 이러한 2가지 필수적입니다. 최선을 다해 나를 갈아엎지만, 동시에 이렇게 구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의 힘으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오직 저를 위해 피흘리신 주님의 십자가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3. 좋은 밭이 되면 끝?
‘4가지 밭의 비유’를 나누었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밭 중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곳은 좋은밭이 유일했습니다. 밭은 갈아엎어질 때 비로소 좋은 밭으로 변해 갑니다. 갈아엎는다는 것은 뒤집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일 위의 것을 맨 아래로, 맨 아래의 것을 제일 위로 바꾸는 겁니다.
기존의 순서가 뒤바뀌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때 그곳에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틈이 생깁니다. 산소가 공급되지 못하던 땅이 숨을 쉽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도 기존의 견고한 생각들이 뒤집어 질 때 일어납니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듭니다. “좋은 밭이 되면 모든 문제가 끝입니까? 좋은 밭이 되면 모든 고민과 근심이 사라지고 오직 기쁨으로 충만해 지고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요?” 4가지 밭의 비유에 이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늘 본문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에선 그것이 “아니다”라는 명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4. 두 질문으로 바라본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2번째 비유인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일명 '가라지 비유’)는 특이하게 비유 속 종들과 주인의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질문과 대답은 2가지입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아니, 웬 가라지입니까?”
: 좋은 밭에 좋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럼 당근 좋은 씨앗만 나서 자라고, 결실해야 합니다. 헌데, 심지도 않은 것이 나서 자라고 있습니다. ‘독보리’라고 하는 밀을 닮은 가라지입니다. 우리 농촌 식물로 설명하자면, 보리밭의 ‘깜뿌기’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은 이 존재의 출현에 대해 종들은 흥분했습니다. 주인은 담담하게 그 원인에 대해 종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으로 첫째 질문과 답은 마무리됩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지금 확 뽑아 버릴까요?”
: 밤에 원수가 와서 좋은 씨앗을 뿌려놓은 밭에 가라지를 몰래 뿌리고 갔다는 주인의 설명에 종들은 정의감과 충성심에 불타올라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장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 흥분한 종들과는 달리 주인은 차분하게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섣불리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뿌리가 서로 얽혀 있는 좋은 곡식들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번째 질문과 대답이었습니다.
5. 가라지 비유를 하신 의도와 의미
원래 비유를 하는 이유는 현재, 또는 현실에 없는 것을 설명해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라지 비유’는 무슨 뜻인지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다참다 저녁에 귀가했을 때 예수님께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의 이 요청과 예수님의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 마 13:36-43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간단히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 뿌림을 받은 겁니다. 근데, 세상에 와 보니, 천국의 자녀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악한 자, 마귀의 자녀들인 가라지도 있습니다. 이 둘이 서로 섞여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게 세상의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조금이라도 바르고, 의롭게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갑갑하고,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언제까지 악인들을 보고만 계시렵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인들은 승승장구하고, 의인들은 괴롭힘과 환난을 당해야 합니까?” … 이런 질문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움을 현세의 악과 고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신정론입니다.
의와 악이 혼재된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장이 아닌 세상 끝이라는 추수 때’에 비로소 악과 가라지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추수꾼인 천사들에 의해 알곡과 가라지는 분류되어, 가라지는 풀무 불에 던져지고, 알곡인 하나님의 자녀들은 해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악과 불의와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라지 비유는 하나님의 때와 심판에 대한 믿음을 권고합니다.
분명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책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지만(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 너무 무결함을 위해 에너지를 쏟다가 정작 자신이 맺어야 할 본연의 열매를 맺지 못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도 내재해 있습니다.
6. 가라지를 분별하라
영성가였던 토마스 그린(Thomas H. Green) 신부는 『알곡과 가라지』에서 이런 가라지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해서 경계했습니다.
첫째, 세상적인 가라지는 곧 구조적인 악을 말합니다.
: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여전히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엡 6:12)하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들이 보고 있는 가시적인 대상들은 모두, 그것이 회사이든 교회이든 나라이든, 구조적인 악으로 탈바꿈하기 쉽습니다.
둘째, 가장 속기 쉬운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욕망입니다.
: 이것은 자신만 아는 ‘은밀한’ 가라지이기 때문에 구조적인 악보다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욕심과 악은 성경의 주요 주제가 되고도 남습니다. …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상승 욕구, 성취 욕구, 인정 욕구, 소유 욕구…. 어떻게 이런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선 우리의 변덕스런 인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상대하기 가장 힘든 사탄이라는 가라지입니다.
: 사탄은 하나님의 흉내를 내고 혼자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는 늘 부하들을 찾고 조력자들을 찾아 이용합니다. 그게 세상일 수도 있고, 우리의 욕망일 수도 있고, 우리의 영적 범위를 넘는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토마스 그린 신부의 글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현재 이런 밭, 이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듯, 선과 악이 혼재합니다. 너무 자주 가라지의 기운에 눌린 곡식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숨막혀 합니다. 곡식에게 가야 할 자양분을 가라지가 가로 채갑니다. 이런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세상,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사탄과 가라지의 악행을 지켜 봐야만 하는, 그러면서도 때를 기다려야 하는 믿음의 시간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7. 하나님 나라와 가라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며, 불합리의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궈가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 히브리서 11:6(새한글 성경)을 통해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믿음을 권면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또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요.”
때로 악이 선을 삼키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삶에 대해 셈하고 계시다는 것과 상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때로 견디며, 기다리며,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불의한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둘째, 종이 아닌 주인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 유년시절 제 눈에 비췬 농촌마을의 생활상 중 주요한 한 가지는 ‘체면문화’였습니다. 형편이 안되도 잔치상에 꼭 준비하는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손님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체면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기도 한데요, 동네사람들이 다니는 논이나 논두렁에 잡초를 방치해 둬서는 안되었습니다. 잡초는 곧 게으른 농부의 표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우사당하는 창피한 일’이라고 여겼기에 땡볕 아래에서도 김을 매거나 잡초를 제거하곤 했습니다.
근데, 가라지 비유 속의 주인은 그 부끄러움을 그대로 감내하며 가라지를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좋은 곡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불명예를 받더라도 선한 목적을 위해 묵묵히 살아갑니다. 이 마음과 이 삶의 태도가 바로 밭 주인의 마음입니다.
조금의 오해도 못견뎌하고, 발끈해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서기 힘듭니다. 환경과 토대가 마련되지 않는데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았던 고난의 종(이사야 53장)처럼 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요동치는 감정의 자리에서도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장차 올 하나님의 위로를 고대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셋째, 내 안의 가라지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 인생이란게 ‘자기 밭’을 경작해 가는 시간입니다. 이 경작의 과정에 우리가 원치 않은 수많은 가라지들과 만납니다. 때로 그 위세에 압도 당하고 눌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자신의 한계가 계속 내면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다른 이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끊임없이 자신을 억누릅니다. 이로 인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안고 자기비하의 길을 걷습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나 나름 주변에서 신실하다는 평을 듣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더 도드라집니다. 평소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 것들에 메여 괴로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의 많은 에너지를 가라지 제거에 쏟아붇습니다. 그만한 노력이면 가라지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이 상하듯 우리 생의 맺어야 할 진정한 것들을 놓치고 맙니다.
때로 불명예스럽고 꺼림칙하지만 가라지를 그대로 둔 밭주인처럼, 마음이 불편해도 우리 삶의 가라지를 안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시켜주실 때 내 안에 내재했던 가라지들을 정리해주실 것입니다.
8. 조금 모자라게, 여백을 두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난 수년 째 제 삶을 돌아보며 적용한 것을 예배순서지 내 <움이 트는 생각>에 실었습니다.
저는 제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완벽주의’를 20대부터 흠모하며 따라 왔습니다. ‘책임감’이라는 명목 하에 늘 자신에게 가혹한 채찍을 휘두릅니다. 근데 이게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파장을 미칩니다. 조금이라도 삐쳐 나오고, 들어간 것을 용납지 못합니다. 속에서부터 발끈하고 화가 솟아납니다.
연주 악기로 치자면, 이런 악기는 좋은 소리가 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공간에선 어떤 울림도 일기 어렵습니다. 비움이 없는 곳엔 둔탁한 마찰음만이 자리할 뿐입니다. 쉼표와 숨표라는 여백이 없는 연주곡은 연주자도 청중도 모두 질식하게 만듭니다.
한때 교회 내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어떤 사람이 “24시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100% 주님을 신뢰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근데, 이것 약파는 것 같습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100%라는 순도는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험도구와 약품을 갖고 인위적으로 만든 실험실 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는 그렇게 100%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따라하면 마치 100% 순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선동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또 다른 폭력이며, 또 다른 가라지를 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태생부터가 상실과 결핍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는 밭입니다. 완벽, 100%는 하나님 외에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너무 빡빡한 틀 속에 자신을 가두고, 다른 이들을 속박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금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같이 살면 됩니다. 채우기 보다는 여백을 두고 서로를 봅시다. 그때 이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은 뜻하지 않은 청명한 울림과 고아한 향내로 울려 날 겁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 아닐까요?
제목 | 성경말씀 | 설교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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