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누가복음 강해 19: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2025-09-14 08:45:17
김상윤
조회수   11

20250914(주일) 누가복음 강해 19 

눅 5:27-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서론) 예수님은 종종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 변방에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신학적 소양과 종교적 경건을 갖춘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생활인으로 고군분투하던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은 또 새로운 제자를 부르십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문제적 인물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막 2:14)라 하는 세리였습니다. 그는 ‘레위’라는 유대식 이름을 부모님께 받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라는 헬라식 이름으로, 마태복음 자료의 전승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리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사회에서 징세청부업자였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자면 일제 강점기 친일부역자와 같은 존재였지요.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로마 제국의 부패한 부역자였으며, 동족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았겠지요. 세금을 마음대로 걷을 수 있는 세리를, 사람들은, 앞에서는 두려워했지만, 뒤에서는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권력과 부를 누리면서도, 사회적 낙인과 고립감으로 외로왔을 것입니다. 동족들의 고통으로 풍족함을 누리는 데 대해 죄의식이나 자책감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세리 레위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행동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을 때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왜 세리와 같은 민족적 배신자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하느냐?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리느냐? 어느 사회나 배제와 배척의 논리는 존재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정치적, 종교적 이슈가 중요했지요. 그런데 이 상황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과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레위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본론) 첫째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 레위를 보셨습니다. 가버나움 세관의 일상은 어찌 보면 그냥 지나쳐버릴 장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리 마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가급적 피하고 싶어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거십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27절). 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세리 레위를 부르실까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심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P)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찾습니까?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까? 이쁘고 잘난 사람? 건강하고 젊은 사람? 구김없이 밝은 사람? 똑똑하고 실력있는 사람? 친절하고 교양있는 사람? 과거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 우리는 내게 유익을 주고,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을 찾습니다.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게 유익을 줄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유익하게 할 사람, 당신이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사람,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사람, 공동체 안에서 존재감도 없고 효능감도 없는 사람,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그 영혼의 깊은 신음 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 예수님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 사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죄인이라고 칭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원래 모두 죄인입니다. 뭔가 부족한 데가 있고,  잘못된 부분이 있고, 망가진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로만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죄인들을 부르셔서 주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해 줍니다. P)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P)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6-28, 새번역).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29). 누구든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고전 1:31).

교회사를 살펴보면 소외되고 쓸모없고 천하다고 방치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 사역을 감당했던 교회의 사례들이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P) 성 프란치스코가 1209년에 창설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P) 18세기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산업혁명기 당시 영국국교회가 다가가지 않았던 광부, 공장 노동자, 도시 빈민층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739년 2월 17일 조지 휫필드의 권유를 받아 처음 웨슬리가 야외 설교를 했던 것은 브리스톨 킹스우드 탄광 지대의 광부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광부들은 눈가에 석탄 먼지가 묻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난생 처음 복음을 들었다고 합니다. P) 19세기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감리교 목사로서 그의 아내 캐서린과 함께 1865년 런던 이스트엔드의 빈민가에서 천막을 치고 전도 집회를 함으로써 ‘이스트런던 기독교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노숙자, 실직자, 알코올 중독자, 범죄자들에게 구호활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P) 이러한 사역을 요약하는 그들의 모토가 “수프, 비누, 구원(Soup, Soap, Salvation)”이었습니다. P) 1947년 고든 코스비 목사는 워싱턴 DC의 빈민가에서 세이비어 교회를 설립하고 영성과 외적 사역의 균형을 강조하며, 지역 사회 섬김과 소외자 돌봄을 핵심 가치로 해서 P) 1960년 비종교인들이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종교적 질문을 할 수 있는 북까페 포터스 하우스를 시작으로, P)노숙자, 알콜/마약 중독자, 저소득 주민, 노인, 장애인들을 위한 주거, 치료, 쉼터 사역 등 150여명의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7개 분야 45개 사역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사역의 연간 예산은 1,500만 달러, 200억원에 이상에 이른다고 합니다. 교회사에서 유명한 몇 가지 사례를 간단히 언급했지만, 지금도 전세계의 생명력있는 교회들은 죄인들을 환대할 뿐 아니라 찾아가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주 속도는 느리지만, 우리 교회도 그러한 교회들의 대열에 함께하려고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십니다.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고 증거합니다(28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망설이지 않고 바로 자신의 직장을 박차고 나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레위는 자신의 동료들과 여러 이웃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이제 세리로서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서 살아갈 것임을 모두에게 천명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했습니다. 세리가 로마의 징세청부업자로서 민족의 배신자 역할을 청산한다고 해서 좋은 마음으로 함께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미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과 갈등을 빚은 차에 예수님의 약점을 잡으려는 의도로 그 자리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제자들과 식사하며 대화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부정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했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거룩과 부정이 섞여 있는 겁니다. 종교적 성별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부정한 사회적 부류와의 교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부정함이 거룩함을 망쳐버린다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세리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고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의 제자들을 나무랍니다. ‘어째서 너희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느냐’며 제자들의 행태를 비방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1-3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창조하시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P) 병원같은 공동체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P) 2023년 가을 온라인에서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방영되었습니다. 보신 분들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정신병동 간호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웹툰이 원작인데, 마음에 상처입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돌보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긴 치유의 과정을 걸어가는지를 따뜻하게 그려줍니다. 이 드라마에서 치유의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갈등을 극복하며 함께 성장하며 치유를 경험하는 관계들로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굳이 의사를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파서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의사를 찾습니다. 좋은 의사를 찾아 병을 고치기를 바랍니다. 장애를 극복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영혼과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 우리는 그 진리를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공동체에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은 치유의 과정 중에 있는 환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직 남아있는 상처와 죄성이 서로를 힘들게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제자들을 나무랐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만드시는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의 일원일까요? 그건 그 바리새인들이 끝까지 자신들은 의인이고 죄인들을 심판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자신들도 죄인임을 고백하는지에 달려 있겠지요. 정욕과 죄악에 물든 우리 마음을 고치시고, 교만과 자기의의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죄에 물든 우리 영혼을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성령의 임재 속에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리 모두는 치유가 필요한 죄인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남아있는 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점점 온전하고 거룩하게 치유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답답한 상황 속에도 주님의 치유의 빛이 찬란하게 비춰오는 아침이 올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죄인을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지만, 죄인으로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것은 죄인을 변화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P)“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인이 회개하면 의인으로 변화가 시작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 3:1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했습니다(전 7:20).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이 진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세상에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의인인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P)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고 표현했습니다. P)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회개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주님의 진리의 빛 앞에서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구하며 또한 우리 옆에 있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용서하는 의인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의인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증거합니다. P)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바울 자신이 죄인이 회개하여 의인이 되는 생생한 사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변화에 한 사람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다메섹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눈이 멀었던 사울(바울)은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 세례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변화됩니다. 처음에는 아나니아도 핍박자 사울(바울)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으나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를 부르셨다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돌보며 세례를 주어 성령충만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위대한 사도 바울의 회심을 가능케 했던 아나니아와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많이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죄인으로서 구원받았음을 겸손히 자각하며 이제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의로운 사역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찾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교우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모아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공동체를 창조하십니다. 우리 뉴라이프교회가 죄인을 환대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레위처럼,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운 사역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죄인을 회개하여 의인이 되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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