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누가복음 강해 17 "주여 원하시면...내가 원하노니..."
2025-08-31 08:45:16
김상윤
조회수   22

20250831(주일) 누가복음 강해 17

눅 5:12-16 주여 원하시면…내가 원하노니

 

서론) 신대원 시절 학우들과 함께 소록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많이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미 한센병은 다 나은 분들이지만, 병을 앓았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예배하며 생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육신의 모습은 망가져 있지만, 그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가 몸에 배어 있고 천국 소망으로 가득한 저런 모습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많은 도전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 교우들과 함께 소록도 교회를 방문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제 전교인 카톡방에 올려 드린 영상처럼 우리의 신앙을 깨우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한 나병 환자를 고치십니다. 성경에서 나병이라 칭하는 질병은 현대의 한센병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일종의 악성 피부병이지요. 건물이나 옷에도 나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3-14장에 걸쳐서 나병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영구적으로 부정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병 진단을 받은 사람은 성소에 나아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부정하다”는 의학적인 진단을 넘어서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판단이었습니다. P)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46). 나병 환자는 가족과 마을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의 모친과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그랬던 것처럼 제한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외부에서 제공해 주는 음식을 먹으며 겨우 연명할 뿐이었습니다. 혹시 이동할 때는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찢어진 옷에 풀어진 머리, 윗입술을 가리고 사람들이 실수로 자신과 접촉하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 큰 소리로 외쳐 알려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서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본론) 첫째로, 주님은 절박하고 겸손한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종교적, 사회적 제약을 뛰어 넘는 한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나병 환자들은 부정한 존재로 간주되어 평생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사회적 소외와 차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나병 환자가 일반인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오는 것은 예외적인 것입니다. 나병 환자 본인에게도 드문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나병 환자가 율법이 명하는 대로 찢어진 옷차림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까요? 점잖게는 사람들의 혐오의 눈빛을 많이 지나야 했을 것이고, 심하면 돌을 던지며 나병 환자의 존재를 저주하는 이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까지 다가 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서 외쳤습니다. P)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절b) “주님,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실 뿐 아니라 치유하기를 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은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자비하신 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 중에 우리의 소원을 함께 품어 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소원을 품지만 그 소원을 이루어줄 능력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를 도와 줄 능력이 있어도 정작 도움을 청하면 자신의 문제처럼 여겨주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괴로움과 사정을 알아주지 못합니다. 함께 사는 가족들도,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도, 때로는 무심하고 무기력하게 보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흑인 영가인 찬송가 372장은 그 가사가 참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1절)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2절) 나 슬픈 일 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3절) 저 마귀 유혹합니다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하소서 오 주여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절박한 사정을 몰라주지만, 주님은 우리 소원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도울 능력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는 우리를 도우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소원을 간절하고 겸손하게 주께 아뢸 때 나타납니다. 성경적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주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 주께서 원하시는지 확신을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둥병자처럼 주님께 간구하면 됩니다. “주여 원하시면.” 주님께 나아가서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며 간절하고 겸손하게 우리의 형편을 아뢰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우리 마음을 몰라 주어도 주님은 절박하고 겸손한 우리 기도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도울 힘이 없어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1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P) 중풍병자나 손 마른 사람, 열명의 나병환자의 경우 말씀으로 명하시고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고치셨습니다(막 2:1-12, 막 3:1-6, 눅 17:11-19). 왕의 신하의 아들이나 백부장의 하인처럼 직접 만나시지 않고도 말씀으로만 고치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요 4:46-54, 마 8:5-13). 맹인의 눈에 침을 바르고 안수하여 고치시거나(막 8:22-26), 날 때부터 맹인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심으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요 9:1-7). 또한 혈루증 여인이나 맹인 바디매오의 경우처럼 환자 본인의 믿음을 통해서 치유하시기도 했습니다(막 5:34, 막 10:46-52). 또 오늘처럼 직접 환자에게 손을 대어 병을 고치시기도 했습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는 행위는 단지 의학적인 치유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자를 둘러싼 오랜 사회적 낙인과 소외의 결박을 푸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만지려 하지 않았던 나병 환자를 만져서 고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찾아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상종하기 꺼려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자주 식사하신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거룩이냐 부정이냐로 세상을 바라보던 유대 종교인들에게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파격적이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에 닿으면 자신들도 부정해진다는 레위기적 사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부정한 자를 만져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동안 죄인이라고 낙인찍혀 공동체에서 배제되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환대의 결정적인 장면이 바로 오늘 문둥병자를 만져서 치유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정케 되는 분이 아니라 거룩케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치유가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바로 예수님께서 치유받은 나병환자에게 명하신 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나병 환자인지 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규례가 레위기 14장 2절 이하에 나와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대로 행하여 나병환자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증거하라고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제 다시 사회의 온전한 일원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당시의 나병처럼 현대에도 사회적인 낙인과 소외를 강요하는 사회적 질병이 있습니다. 에이즈 환자라고 하면 당장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기지요. 정신 질환으로 진단을 받으면 당장 취업이나 사회 생활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저소득층과 노숙인, 판자촌 거주민 같은 경제적 주거 취약 계층, 전과자, 이주민, 탈북민, 성매매 피해자 등 사회적 특수 계층, 다문화/한부모 가정, 독거 노인 및 소년소녀 가장, 복지 시설 거주자 등 현대 사회 속에서 사회적으로 낙인찍히고 차별을 받을 염려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에 대해서 편견과 배제의 자세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환대하며 도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2023년 기준 한국 개신교인 인구 중 29%(226만명)에 해당하는 가나안 성도들과 8.2%(59만명)에 달하는 사이비/이단 신자들에 대해서 정통 교회가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가나안 성도와 이단 종파에 속한 이들 중에 청장년 비율이 정통 교회에 비해서 훨씬 높은 것은 정통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기존 정통 교회가 40대 이하 청장년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부정하다고 배제한 것이 아니라 환대하고 만져서 치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려 죄인들을 환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대 종교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했을 때에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P)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환대와 포용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낙인이나 배제는 교회의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 자매로 환대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시는 사람에게 우리도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는 사람에게 우리도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환대하여 안아 주시니 우리도 환대하여 안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환대하시는 이를 기쁘게 환대하시는 모든 교우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주님은 기도의 우선 순위를 지키셨습니다. 15-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P)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나자 이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도 듣고 자신들의 병도 치유받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이 있지요. 대중적인 인기를 끌 때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세속의 지혜입니다. 인기는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실망할 것에도 마음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중한지 아셨습니다. 예수님께 제일 소중한 분은 하나님 아버지셨고, 예수님께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하루의 사역을 마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 안에 거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귀신들려 말 못하는 아들을 데려온 한 아버지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P)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이 때에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P)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다시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요청합니다. P)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그리고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그 아이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왜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P)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기도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간절히 충분히 기도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답답함이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은 모두 놀랍게도 기도가 약해집니다. 기도의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이 줄어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 줄어들고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많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사역의 열매를 맺으셨고, 나아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명을 감당하시는데까지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일 뿐이고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다시 기도의 자리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기도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문제를 두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P) 당신에게 나아온 나병환자처럼 절박하고 겸손한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나병환자처럼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들을 만지시고 치유하십니다. P)교회는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을 예수님처럼 환대해야 합니다.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P)예수님은 결코 기도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하는 시간, 기도의 자리를 지킬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환대와 치유의 사명에 동참하시며 기도의 우선순위를 지키시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제목 성경말씀 설교자 설교일
Mr. 1 1 01/01/1967
Mr. 1 1 01/01/1967
누가복음 강해 17 "주여 원하시면...내가 원하노니..." 누가복음 5:12-16 김상윤 목사 2025-08-31
누가복음 강해 16: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눅 5:1-11 김상윤 목사 2025-08-24
하나님의 나라 - 좋은 씨와 가라지 마태복음 13:24-30 유경호 목사 2025-08-17
누가복음 강해 15: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예수의 치유/축사 사역 누가복음 4:31-44 김상윤 목사 2025-08-10
누가복음 강해 14: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 누가복음 4:14-30 김상윤 목사 2025-08-03
누가복음 강해 13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예수 누가복음 4:1-13 김상윤 목사 2025-07-27
누가복음 강해 12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누가복음 3:21-22 김상윤 목사 2025-07-20
누가복음 강해 1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누가복음 3:1-20 김상윤 목사 2025-07-13
누가복음 강해 10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해 가신 예수 누가복음 2:40-52 김상윤 목사 2025-07-06
누가복음 강해 9 시므온과 안나: 노령의 사명자들 누가복음 2:21-39 김상윤 목사 2025-06-29
누가복음 강해 8 복음의 첫 증인들 누가복음 2:1-20 김상윤 목사 2025-06-22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에베소서 1:3-14 김상윤 목사 2025-06-15
마음, 행동, 열매 갈라디아서 5:16-26 김상윤 목사 2025-06-08
잘 싸우는 법(Fight Right) 3: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4-21 김상윤 목사 2025-06-01
잘 싸우는 법(Fight. Right) 2: 어떻게 싸울 것인가? 에베소서 6:13-20 김상윤 목사 2025-05-25
1 2 3 4 5 6 7 8 9 10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