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설교
20250601(주일) 잘 싸우는 법(Fight Right) 3
롬 12:14-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서론) 우리는 악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P) 황량한 광야에서 길을 잃고 풍찬노숙하며 여러 날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P) 항해를 떠났는데 역풍을 만나 원래 항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 설상가상 어디에선가 물이 새고 있을 수도 있구요. P) 억울하게 철장 안에 갇혀 명예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박탈당하여 어둠 속에서 탄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P) 내 몸의 일부가 나를 배신하여 작동하지 않는 장애나 내 안에서 망가져가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P) 나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심지어 배반하는 경험들 속에서 삶의 의욕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본적인 삶의 조건입니다. P)기독교 신학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어려움의 현실을 악(惡)이라고 부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의 악을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P) 죄악(罪惡)과 해악(害惡). P) 죄악은 우리가 선택하는 도덕적 실패이고 P) 해악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현실입니다. 우리 죄악의 결과가 세상의 해악이지요. 쉽게 말해 누군가의 죄악으로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해악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의 친밀했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던 피조세계가 이제 그들에게 삶의 수고스러움과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악으로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죄악의 해결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에게 영생의 삶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후에야 우리는 세상의 악의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질문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P)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바로 그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P)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교회는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악의 문제를 해결받은 신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해악을 어떻게 다룰 지 함께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악한 영들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 싸워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악과 싸울지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본론) 첫째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해악을 끼치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합니까? 1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박해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박해하는 자가 어떤 사람들일까요? 기독교는 초기 300년의 역사에서 유대교의 박해, 로마 제국의 박해, 이방종교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신상을 만들지 않는다고 무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주님의 살과 피에 동참하는 성찬식을 한다고 인육을 먹는다는 오해도 받았고, 아가페 밀, 사랑의 식사를 나눈다고, 당시 이방 종교들 중의 하나처럼 음란한 종교라고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주(퀴리오스)라 부르기를 거부하고 예수님만 주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황제에 불충성한 반역자들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죄목들이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묵히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P)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예수님의 말씀에서 박해하는 자들의 모습이 더 현실감있게 다가옵니다. 이들은 우리를 왜곡하고, 모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이지요.
또 16절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P)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바로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과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이지요. 교만한 사람을 알아보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P)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상). 교만한 사람이 나서면 거기에는 꼭 다툼과 갈등이 생깁니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관하려고 합니다. 리더쉽이 있는 모습과 교만한 모습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가 다르지요. P)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참된 지혜는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낮은데 마음을 두는 겸손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P)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스스로 지혜로운 것처럼 구는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한 마디 해 주고 싶고 반박하고 싶고 그러신가요? 자신에 대해 터무니없는 억측으로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들으시면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살다보면 그런 경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내 평판을 깎아 내렸으니 나도 그 사람 평판을 깎아 내리고 약점을 드러내는 뒷담화를 하면 속이 후련해지시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러면 안된다고 주님이 그러십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위해서 축복해 주고, 기도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축복했는데 그 사람이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면 그 사람이 복을 받지만, 만일 그 사람이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복이 축복하는 사람에게 돌아오기 때문이지요(눅 10:5-6).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복의 통로가 되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마음을 다해 읽어보겠습니다. P)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잠 11:11). 우리 모두 교회를 부흥케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는 중보기도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정의로운 보복자(The Avenger)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P)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 갚는 것”이라는 어구가 우리에게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누구와 철천지 원수가 되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테니까요. 그런데 이 말씀을 새한글성경 번역으로 다시 읽으면 우리 마음에 확 다가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앙갚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벌하심에 자리를 내드리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요. “앙갚음은 나의 일! 내가 되갚아 줄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19절 새한글성경) 어떤 단어가 귀에 확 들어오시나요? ‘앙갚음’! 앙갚음이 뭔가요? 마음에 앙심을 품고 그것을 되갚아주려는 행동입니다. ‘니가 나한테 이렇게 해? 두고 보자. 언젠가 큰 코 다치게 해 주겠어!’ 이런 식이지요. 이러한 앙심을 품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누군가의 험한 운전 때문에 사고를 당할 뻔 했을 때에 이런 앙심이 생기기도 하고, 누군가 사람들 앞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의 체면을 깎았든지, 자존심을 상하게 했든지, 뭔가 내게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면, 되갚아 주고 싶은 ‘앙심’을 품게 되지요. 의외로 우리의 인간 관계 속에 이러한 앙심을 품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말로 ‘복수심’이지요. 복수심은 나름의 정의감, 스스로 의로운 판단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는 앙심을 품을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게 부당하게 해악을 주었다고 믿는 당사자에게 앙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앙심을 품을 때는 자기 반성이나 객관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도 앙심을 품은 상황이 해결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수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앙심을 품으면 뭐가 문제일까요? 앙갚음, 보복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P)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앙갚음하는 개인은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앙갚음의 악순환이 개인과 집단을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앙갚음은 또 다른 앙갚음을 낳지요. 결국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생각해 보십시오. 복수는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암시하는 것처럼, P) 앙갚음의 더 큰 문제는 앙갚음하려는 시도는 자기 임의로 하나님 역할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중대한 과오이지요. “앙갚음은 나의 일! 내가 되갚아 줄 것이다.” 앙갚음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정의롭게 앙갚음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적절한 방법으로 복수하겠다고 하십니다. 혹 우리가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었다면 스스로 앙갚음할 기회를 노리면 안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시편 기자들처럼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친히 보복해 달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P)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도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셨는데 하물며 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정의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무모한 일입니다. 사람은 심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자주 잘못되고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정치권을 배경으로 해서 언론에 등장하는 여러 고발과 비난의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의 많은 것은 가짜 뉴스로 판명이 나지요. 사실 여부와 상관없습니다. 당장 정적에게 타격을 입히면 정치적 목적은 달성한 것이지요. 얼마나 검증되지 않은 찌라시 보도가 많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목적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이비 언론처럼 판단하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복자, 심판자가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 우리 앙심을 토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복수심이 우리 삶을 망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20-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P)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도 바울은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P) “저주하지 말라”, P)“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P)“원수를 갚지 말라”, P)“악에게 지지 말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원수 마귀는 우리가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에 악의 총량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악이 점점 늘어가는 것은 밀폐된 공간 안에 산소가 줄어들고 이산화탄소가 늘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숨쉬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장소는 죽음의 공간으로 바뀌어갑니다.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악은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악한 방식의 싸움은 모두에게 패배를 가져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십시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죄수로 10대, 20대 시절을 보내었지만, 하나님께는 그를 통해 이루실 선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P)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은 세상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계획을 실현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선한 일을 도모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다시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수요기도회에, 주일 오후 온세대예배를 위한 기도회에 참여해 주십시오. 목장에서 다시 기도하는 모습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토요일 공동체 헌신 새벽기도회에 나와 교회 청소에 함께 동참해 주십시오. 주께서 허락하신 예배 처소입니다. 주께서 이름을 두신 소중한 공간입니다. 이 공간이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매주 토요일에 여러분의 정성을 모아 주십시오. 새 예배당에는 성도들의 손길이 필요한 공간이 아직 많습니다. 다시 플로깅 전도하는 자리에 나오십시오. 우리 교회가 위치한 주변 도로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뉴라이프교회 교인으로서 보람을 느끼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손쉬운 길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악한 현실 속에서 악으로 악을 해결하려하지 마십시오. 정의로운 심판자요 보복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복수를 맡기십시오. 선한 일을 도모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한글성경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으며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4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빌어 주십시오. 복을 빌어 주시고, 악담은 하지 마십시오. 15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주제넘은 생각을 버리고,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훌륭한 일에 마음을 쓰십시오. 18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앙갚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벌하심에 자리를 내드리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요. “앙갚음은 나의 일! 내가 되갚아 줄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20오히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면 그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목말라하면 그에게 마실 것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불타는 숯을 그의 머리 위에 쌓아 놓는 것이니까.” 21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정복하십시오.(새한글성경)
제목 | 성경말씀 | 설교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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