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설교
20241222(주일) 대림절 넷째 주일
욘 4:1-11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서론) 살다보면 화가 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답답하거나 화가 치밀어 오르면 벽이라도 한 대 주먹으로 치고 싶고, 죄없는 의자라도 냅다 발로 차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들이 터져 나옵니다. P) ‘왜 행동을 저따위로 해?’ P)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 모양이지?’ P) ‘저러고도 나라의 녹봉을 받나?’ P) ‘저 사람이 예수믿는 것 맞아?’ P) ‘왜 이리도 내 마음을 몰라주지?’ P)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나?’… 거시기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거시기한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적어도 그 당시 우리 자신에게는 정당한 일입니다. 저 사람이 불의하고 이 상황이 부당하게 판단될 때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입에서 욕이 나오기도 합니다. 분노는 P)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 이에 저항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P)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즉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의 일곱가지 감정 중의 하나가 분노입니다. 그런데 분노는 종종 우리 삶을, 우리 인간 관계를 망쳐 버립니다. 철로에서 이탈한 기차처럼 삶의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하는 수렁에 빠뜨려 버립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나는 오늘 이 본문에서 무엇인가를 매우 싫어하여 성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어떤 사건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나의 사건을 통해서 종종 우리를 사로잡는 분노의 마음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P)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에 대해 심판의 메세지를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P) 하지만 민족주의자인 요나는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쪽인 다시스, 지금의 스페인 지역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치는 선지자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지 않으셨지요. 큰 폭풍을 일으키셔서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르게 되어, 배에 탄 사람들은 이 갑작스런 폭풍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제비를 뽑아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요나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요나는 자신 때문에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고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폭풍이 멈추었습니다. P)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는데 요나는 밤낮 삼 일을 큰 물고기 뱃속에 머물며 회개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토하여 냄을 받아 다시 니느웨로 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요나의 이야기는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놀라운 상황이 계속 전개됩니다. 죽음의 바다에서 회개하고 겨우 살아났으니 이제 요나는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니느웨는 “사흘 길을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3:3)인데 요나는 겨우 하루 동안 다니며 짧은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P)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너무 성의없는 모습이 아닙니까? 마지못해서 겨우 하룻동안 선지자 노릇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성의없는 요나의 선포에도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니느웨 왕에게까지 그 소식이 전해져서 왕도 화려한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왕의 조서를 내려 짐승까지 물도 마시지 말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힘써 부르짖어 회개하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명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의 진실한 회개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악한 삶의 방식을 버렸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요나의 사역은 놀랍게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경험해 보는 것은 모든 목회자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것은 요나가 최선을 다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또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P)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1절). 요나는 자신의 성의없는 설교에 니느웨 사람들이 국가적으로 회개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 심판의 계획을 철회하시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놀랍게도 화를 냈습니다. 마치 정말 일어나면 안되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처럼 성을 내었습니다. 요나가 분노에 가득차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또 기가 막힙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을 또 용서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게 싫어서 저는 다시스로 도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제가 알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이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우리 민족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살 길을 얻는 것을 저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불순종으로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것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셨는데 이제 스스로 죽겠다니요? 화가 나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마구 말하는 것이 사람이지요.
이런 요나의 반항적인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요나에게 이렇게 짧게 말씀하십니다. P)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4절)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성내는 것이 옳을까요? 분노는 어떤 상황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분노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자주 표출될 때에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분노조절장애’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다음 질문에 대해서 예/아니오로 대답해 보십시오.
P)1)게임에서 본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날 때가 자주 있다
2)성격이 급하고 흥분을 잘하는 편이다
3)다른 사람의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꼭 마찰이 일어나게 된다
4)내가 잘한 일은 반드시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화가 난다
P)5)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6)화가 나면 주변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한다
7)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감을 느낀다
8)상황이 잘못되면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P)9)화가 날 때 거친 말과 사나운 태도를 표출한다
10)중요한 일을 앞두고 화가 나서 그 일을 망친 적이 있다
11)화가 쉽게 풀리지 않아서 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12)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 열 두가지 질문에 대해서 9개 이상 예라고 대답하는 경우에는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껴서 성을 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판단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우리의 분노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내가 옳고 그른가, 누군가가 옳고 그른가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한 해결책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짜증내고 성내고 분노하는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내가 성내고 분노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의로움이 우리 분노의 이유인 것 같지만, 사실 그 밑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P)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약 1:21a). 우리가 잘못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할 때에 우리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더러운 죄악의 찌꺼기가 하수구 역류하는 것처럼 넘쳐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을 내어도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예 분노를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분노를 표출하는 지혜로운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5-27). 짜증과 분노가 올라올 때에 마귀로 틈을 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화가 나면 상대방에 대해 부당한 평가를 쉽게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이런 말을 했으니 마치 그 사람은 정말로 몹쓸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나쁘게 말할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정치인들이 하는 것을 보십시오. 어떤 문제에 대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당을 악마화하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적어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싫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환대하셨는데 누가 배척합니까? 누가 거짓된 말로 형제 자매를 실족하게 합니까?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분노를 품는 것은 숯불을 손으로 집는 것과도 같습니다. 분노를 품은 사람이 먼저 화상을 입고 고통받게 됩니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마귀가 쉽게 거짓으로 관계를 망가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죄를 짓지 않고 분을 내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분노를 터뜨리지 말고 우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정말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잘 듣지 않으면 성급하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관계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요. 서로 신뢰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경우에 사람은 흔히 방어적으로 대화에 임하게 됩니다. 자신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편견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에 그것을 건드리는 단어나 상황만으로도 거의 자동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과거의 경험과 상처가 현재 우리 분노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렇게 폭발시키는 분노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그 의도대로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잘 듣지 못합니다. 정성을 다해 경청하는 일은 훈련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 분노를 표출해야겠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에 그것을 즉시 말로 폭발시키는 것보다 우선 입을 굳게 다무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방이 말을 끝내고도 적어도 10초 정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or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를 열 번 정도 속으로 반복하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황이 되면 ‘나-전달법(I-message)’으로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도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차분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낼 때에 보통 ‘너-전달법(You-message)’으로 상대방에게 충고하거나 조언하거나 상대방의 행동을 평가하거나 판단합니다. “넌 참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그런 말 하면 안돼.” 반면 ’나-전달법(I-message)’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비평없이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P)1)행동: 문제가 되는 상대방의 행동을 사실대로 차분하게 말합니다
P)2)영향: 그 행동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자세히 말합니다
P)3)감정: 그 영향 때문에 생긴 나의 감정, 느낌을 솔직하게 말합니다.
‘너-전달법’을 ‘나-전달법’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넌 참 형편없는 사람이구나”=>”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 내가 속이 상하는구나. 왜냐햐면 네가 여러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될 것 같기 때문이야”
“그런 말 하면 안돼”=>”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화가 많이 나는 모양이구나. 맞아.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 네가 그런 마음이 들어 내가 미안하고 너에 대해 염려도 되네.” 내년에는 이러한 ‘나-전달법’이나 ‘비폭력대화’ 같은 대화의 연습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이제 다시 요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P)요나는 니느웨 성읍 동쪽 언덕에 앉아서 초막을 짓고 니느웨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봅니다. P) 그런데 하나님께서 박넝쿨이 금새 자라게 하셔서 초막을 덮어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 주게 하십니다. 요나는 좋은 그늘이 생기니 아주 기뻐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하나님께서 벌레를 예비하셔서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또 해가 뜰 때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셔서 요나가 더위에 열사병에 걸릴 지경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런 더위 속에서 버티느니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이렇게 물으십니다. P)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는 지지 않고 대답합니다. P)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9절) 요나도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 바락바락 대어들 수 있을까요? 자신이 성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박넝쿨을 주셨다가 하룻만에 죽게 하셔서 자신을 다시 더위에 시달리게 만드신 하나님의 변덕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런 요나의 모습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면서도 늘 분노가 넘쳤습니다. 짜증내고 성내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내는 요나에게 당신의 속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P)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온 세계 민족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어린이들도 가축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밴댕이 속알딱지 같은 민족주의자 요나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셨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사람들과 피조물을 아끼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실패하는 자에게 또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종 나와 맞지 않아도, 지금은 내가 좋아할 수 없더라도, 주의 몸된 교회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주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나를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귀히 여기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P)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요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허물을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슬기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형제 자매의 허물을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합시다.
결론) 요나의 이야기는 열린 결론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도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요나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응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어떻게 네화답할지 여부는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스스로 옳다고 믿으며 형제 자매에게 성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싫은 사람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며 하나님 앞에 우리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제목 | 성경말씀 | 설교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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