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설교
20241229(주일)
약 1:19-25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좌우에 계시는 성도들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전대미문의 국정 혼란의 상황이 벌어져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을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믿음으로 우리는 사랑함에 성장할 수 있습니다.
2024년의 마지막 주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주제는 P) 지난 주와 같이 다시 ‘분노’의 문제입니다. 12월 3일의 비상계엄 사건과 연이어지고 있는 탄핵 정국으로 인해 온 국민이 걱정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내란이라고 보는 대다수의 국민들과 뜻을 달리하는 분들조차도 다른 이유때문이지만 동일한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광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없더라도 우리 마음에는 여러 이유로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부당한 일들이 우리 삶에서는 여기 저기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P) 지난 11월달의 대설로 청청해 보였던 소나무 가지들이 속절없이 부러지고, P)연약한 지붕들이 곳곳에서 무너졌던 것처럼, P) 쌓여만가는 분노의 무게가 언제 우리 삶을 무너뜨리고, 우리 관계를 망가뜨릴지 모릅니다. 분노 때문에 결혼을 깨뜨리고, 계약을 깨뜨리고, 공동체를 떠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P)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네가 성을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느냐?”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가 침해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분노”라는 우리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더 성장할 수 있을지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첫째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성내지 않도록, 잘 듣고, 말을 아껴야 합니다. 19-20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자기의 의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분노하며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성급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잘 듣지 않으면 성내기 쉽습니다. 성내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격이 급해서 화를 잘 낸다고 합니다. 기질 탓을 합니다. 자극에 대해 반응이 빠른 기질의 사람이 있고 자극에 대해 반응이 느린 사람이 있습니다. 급한 사람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급하지 않은 사람도 화가 나지만 그 화를 즉시 터뜨리지 않을 뿐입니다. 성내기를 잘하면서 그것을 기질에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것은 인격의 성숙도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화를 내면 대화를 잘 나눌 수가 없습니다. 쉽게 화를 내면 잘 듣지 못합니다. 잘 듣지 않으면 잘 말할 수 없습니다. 화를 내는 사람은 대개 도를 지나치고 어리석은 잘못을 하게 마련입니다. P)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잠 29:20). 우리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데 중간에 자신의 말을 하느라 끝까지 듣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화가 나는 상황일수록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도 말이지요.
상대방이 저런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욕구가 있어서 저런 말을 할까, 저 사람에게는 어떤 상처가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으면, 화난 사람의 말은 나에 대한 부당한 오해이고 공격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비폭력대화(NVC)라는 개념을 만든 마셜 로젠버그는 공감과 연민의 마음으로 들으면 사람들의 말은 결국 두 가지로 수렴된다고 합니다. P) ‘부탁합니다(please)’와 P) ’고맙습니다(thank you)’. 많은 사람들이 이해받고 싶고, 연결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를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분노와 원망과 비난의 말로 감추어진 욕구를 표출하게 됩니다. 많은 경우 어떤 사람의 분노에 찬 말은 상대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분노하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화가 나는 상황에는 입을 닫으십시오. 화가 날 때에 결코 지혜롭고 유익한 말, 상황을 좋게 만드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P)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면서 상대방의 숨은 욕구와 상처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오를 때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드렸나요? P)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열 번만 속으로 반복하십시오. 그리고 성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고백하는 백성들 중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아오실 때에 세례 요한이 말렸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백성들과 하나되기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들처럼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들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를 철저히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 의를 침해받았다고 화내지 말고 참아야 합니다.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주님께서 노하기를 더디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을 몸소 보여 주십니다. 성내지 말고 잘 들을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회개 기도로 마음의 더러운 악을 내보내야 합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P)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 마음의 더러운 악을 배출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분노할 때에라도 사실 그 정당한 이유보다 훨씬 많은 악이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가장 정당하고 진정성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우리 마음은 온전히 선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 따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 17: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P)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8-19).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현재 우리 모두의 내장 속에 배설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 속에도 영적 배설물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배설물이 아래로 나가야지 위로 올라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끔 하수구에서 악취가 올라오거나 심하면 오수가 역류하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 영혼의 오물이 우리 입을 통해서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낼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분노할 때만은 아니지요. 시기와 질투, 미움과 비방, 조롱의 말들을 쏟아낼 때에 우리 마음의 더러운 것들이 나옵니다.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하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아이들이 하는 욕설들이 무슨 뜻인지 사전에서 꼼꼼히 찾아보고 시옷자나 지읒자 들어가는 그런 욕설들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수십년간 99.99% 잘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오랫동안 금기시했던 그런 욕설이 제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적이 가끔 있습니다. 물론 혼잣말이지요. 스스로도 정말 놀랍니다. 제 마음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도 여러분의 마음과 입술은 깨끗하신가요?
우리가 성내며 분노를 폭발하는 식으로 우리 속의 더러운 악을 쏟아내어서는 안됩니다. P) 오수는 하수 처리 시스템을 통하여 배출해야 합니다. 영적 하수 처리 시스템이 무엇입니까? P) 회개 기도 입니다. P) 우리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시 51:10). P) 세리가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기도했던 것처럼,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눅 18:13).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날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성낼 때에 우리 영혼의 더러운 것들이 우리 입술을 통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과 교회의 영적 환경이 더럽고 악취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지키고, 회개의 기도로 우리 영혼을 정화할 때에 우리 영혼은 구원받은 자에게 합당한 영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할 때에 ‘온유함'(프라우테티)은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진 상태나 냉수를 마셔 갈증이 해소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여러분의 영적 배설 기관은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정화조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회개없는 영적 건강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죄악의 똥을 영혼의 뱃속에 계속 쌓아두지 마십시오. 회개하는 것을 불편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를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서 성령님의 변화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 갑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내고 화내고 정죄와 비방의 말들을 한 것을 회개합시다. 우리의 입술로 상처입은 영혼들이 치유함을 받고 회복될 수 있도록 회개하며 기도합시다.
셋째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오늘 들은 말씀을 오늘 실천해야 합니다. 22, 25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 말씀은 믿고 실천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단지 듣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독하고 묵상해도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P)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은 분명 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켜 행해야지요. 우리가 만일 맛있는 음식을 입에서만 씹고 삼키지 않고 다 뱉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무리 씹어도 허기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힘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기해도 묵상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믿는 것은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잘 씹어 삼키는 것입니다. 말씀은 믿음으로 받고 영혼 깊숙이 들어가야 우리에게 영양분이 됩니다. P)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우리가 수십년을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만큼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예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거나, 말씀을 머리로 듣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들은 말씀을 당장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전으로 온전하게 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해방하시는 그 능력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 우리를 세우시는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만 나타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P)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자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하십니다. 반면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라고 하십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어떤 집을 짓는 신자가 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줄줄 외웠습니다.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했습니다. 십일조도 하고 금식도 하고 일반 죄인들이 짓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P)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P)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그들의 종교적 열심 속에 자기 의를 과시하려는 마음, 사람의 영광을 구하려는 동기가 가득했기 때문에 율법의 더 중한 바 그 정의와 인애와 신실함은 저버리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영광을 더 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외식하는 자들, 위선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내가 바리새인같은 신앙인이 아닌가?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행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같은 지도자가 아닌가? 내가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받고 싶어하지는 않는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오늘이나 가까운 시일 내에 여러분이 화낼 만한 상황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성내지 마십시오. 분노에 차서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성내지 마십시오. 화를 낼만한 상황에 처해도 오래 참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늘 자신을 성찰하시고 날마다 회개함으로 우리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정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에 이루어지는 복을 받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목 | 성경말씀 | 설교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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