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설교
오늘 본문 요한복음 8:32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지요? 뭔가요? 네 “진리, 알다, 자유”라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지요. 그럼, ‘진리’가 뭘까요? 진리를 헬라어로는 ”알레데이아“라고 하는데 감추인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진리는 한자로 풀이하면 “참 진, 이치 리” “참된 이치”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만들어진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사용될 때 가장 잘 움직이고 작동할 수 있지요. 제가 미국에서 갔을 때 디시워셔를 처음 사용해 보게 되었는데요. 디시워셔가 뭔지 아나요? 접시를 닦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디시위셔에는 전용 세제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을 몰라서 퐁퐁을 넣고 기계를 돌렸더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좀 있다 가봤더니 비누 거품이 흘러나와서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더라구요. 디시 워셔에는 그것에 맞는 전용 세계을 넣어 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래 만들어진 작동 원리에 따라서 움직일 때 가장 잘 돌아가게 되어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작동 원리, 참된 이치, 진리를 알고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에 가장 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인간 사용 설명서,”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성경이구요 이 진리를 온 몸으로 구현하며 살아가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계실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어떤 이는 이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리가 누구냐?“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진리를 온 몸으로 구현하셨고 이 땅에서 진리가 살아 움직이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삶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며 살아가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교회 가기“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교회 되기“라는 인식도 생겨나고 있는데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참 교회가 되어 진리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알다”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요. “안다”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야다”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기노스케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굉장히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안다는 것은 온 몸으로 아는 것, 사랑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커 팔머 같은 분도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헬라어 기노스케인도 마찬가지로 단지 머리로만 아는 것을 넘어서서 가슴과 온몸으로 안다는 전인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됨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될 때 진리가 고통에 찬 이 땅을 치유하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원어적인 의미에서 “안다”는 것은 지.정.의를 포함하며, 그 이상으로 전인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전인적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에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인데요. 오늘 본문 말씀인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깨달음의 순간, 인식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어떤 장소에 갔을 때 그 건물 구조가 복잡해서 좀 얼떨떨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좀 헷갈리는 건물 구조도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전체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오면서 “아하!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지요. 이것을 “아하 모먼트”라고도 하는데요. 이 때가 바로 인식의 상상력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지금까지 알고 있던 과거의 지식과 경험의 조각들이 하나로 모아지며 전체를 보게 되는 순간,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도 이러한 큰 깨달음의 순간이 있습니다. 교회에 처음으로 나오신 어떤 분이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오십시오”하는 말씀을 듣고 그저 꾸준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셔도 무슨 소린지도 잘 모르겠고, 때로는 졸기도 하고 자기도 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졸다가 잠깐 정신이 들었는데 그 때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목사님 설교 말씀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들어도 별 의미 없이 들렸던 이 말씀이 갑자기 이 분의 마음 속에 번개처럼 번뜩이는 깨달음으로 찾아왔습니다. “아, 하나님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하나 뿐인 아들을 날 대신해서 이 땅에 보내 주셨구나. 이 예수님께서 날 위해 해주신 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죄와 죽음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연결되어지는 것이구나. 그리고 다시 연결되어진 이 관계는 나의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서까지 이어져서 나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느닷없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 풍성하게 거할 때에 때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던 말씀의 조각 조각들이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에 하나로 연결되어서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릴 때 점 잇기 활동을 할 때, 점만 찍혀 있었을 때는 무슨 모양인지 잘 모르지만 그 점들을 잘 연결헤 나가다 보면 물고기 모양도 나오고, 사람 모양도 나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에는 소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고, 이해가 안갈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순간에 복음의 진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두신 기쁜 소식의 진리를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여러분은 어떤 때 자유함을 느끼십니까?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이부자리에서 발 쭉 뻗고 잠자리에 들 때 입니까? 아니면, 모처럼 휴일을 맞이하여 자유 시간을 맘껏 누릴 때입니까? 아니면, 그 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속 시원하게 풀렸을 때입니까? 어떤 분은 막혔던 변기가 뻥 하고 뚫렸을 때 자유함을 느낀다고 하더라구요. 네, 우리는 이럴 때 자유를 느낍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이전에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깨달아지고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하고 문제가 풀리는 느낌, 자유함을 맛보게 되지요. 우리가 보는 드라마 중에 “법대로 사랑하라”라는게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밤늦게 아이가 엄마에게 말도 안하고 나와서 카페에 있는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가 갑자기 없어졌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놀라서 거리를 헤매며 찾아다니다가 카페에서 아이를 발견하고 막 야단을 치지요. 그런데 아이는 왜 그렇게 늦은 시간에 엄마에게 말도 안 하고 카페로 달려온 것일까요? 네, 엄마가 많이 아픈 것 같아서,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에 이렇게 밤늦게 카페에 있는 변호사에게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뒤늦게야 아이의 이런 마음을 알고 나서 한 가지만 보고 아이를 막 야단쳤던 것을 후회했겠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을 겪을 수도 있고 잘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이성이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자리에 온전히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밀가루를 부드럽게 거르는 체를 알고 계시지요? 체에는 구멍이 좀 큰 것도 있고 더 세밀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논리는 구멍이 큰 굵은 체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것이 빠져나가 버리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성이나 논리의 약점을 보완하고 더욱 온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신앙과 같은 더욱 세밀한 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늘 말씀과 기도 가운데 풍성히 거함으로 우리의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큰 신비함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말씀합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진리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유함을 맛보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일하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 참 자유함이 찾아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 안의 모든 어두움들- 아픔, 슬픔, 우울함, 상처, 미움 – 이 모든 것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삶과 공동체를 빛으로 가득차게 해 주십니다. 슬픔 대신 희락을, 우울함 대신 기쁨을, 아픔 대신 치유와 회복을, 미움 대신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늘 이 진리를,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심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사랑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주님 주시는 자유함을 맛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형상,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가식의 옷을 하나씩 덧입으며 왜곡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의 이러한 가짜 모습들, 왜곡된 모습들을 비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 자유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혹시 명품 가방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을 알고 계시나요? 네, 비오는 날 우산이 없을 때 가방을 가슴에 품고 달려가면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네 그럴 때는 진짜 가방이구요. 비가 올 때머리에 떨어지는 비를 가방으로 막고 달리면 가짜 가방이랍니다. 우리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을 단지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막는 방패막이로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 품 속에, 마음의 중심에 소중하게 모시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맘껏 일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릴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바탕을 옥토와 같이 일구어야 하는데요. 우리가 감사할 때, 그리고 마음을 비울 때 우리의 마음이 넓어져서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풍성한 감사와 비움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감사함으로 우리 마음을 옥토로 기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다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그 하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신뢰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딱딱해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경작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부드러운 마음밭 가운데서 말씀의 씨앗들은 맘껏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무럭 무럭 자라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코의 “항상 감사하기”라는 시의 일부를 함께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하기 - 지코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손님이 오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집사님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또 우리가 신앙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처럼 한없이 낮아지고, 자신을 비우는 일일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없이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내는 삶이셨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또 낮추시는 삶이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며 참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또한 참 인간이신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죄와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는 용서와 새생명과 소망과 기쁨과 사랑과 자유함의 선물들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지고, 비우시는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주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멀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이는 “삶이란 오랜 여정입니다. 최대한 가볍게 살아가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을 조금 더 가볍게 하고 싶다면 불안한 마음에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그것을 덜어내는 용기를 가지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내 것을 비워내고 덜어낼 때 우리 주님이 내 안에서 더욱 커지고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것을 비워내고 덜어낼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크리스찬의 생활 방식으로 “나를 위해 적게 쓰고, 남을 위해 많이 쓰는 삶을 추구하십시오”라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면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몸이 아픈 이들, 마음이 아픈 이들을 치유하셨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외롭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참 평화, 샬롬이 이루어졌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자유함이 넘쳐 흘렀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비우며 결국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버리셨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가장 실존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우리에게 참 자유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참으로 알 때, 진정으로 사랑할 때,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과 자유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주시는 이 깊은 평안과 자유함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예수님처럼 비우고 또 비우며 살아가는데 갑자가 이런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왜곡된 우리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워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야 하지만, 살아가면서 끝까지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하구요. 이 진리의 말씀을 온몸으로 구현하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하겠지요. 또 예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셨던 삶의 가치- 사랑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이 되고 사명을 감당해야 참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랑, 사명 – 다 “사”자로 시작하지요? 이 세 가지를 늘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게될 때 우리는 사랑이 되고, 주님과 함께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사명을 감당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끼치며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우리는 그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 크리스찬의 삶에는 칭의를 넘어서 성화의 삶이 있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깊은 데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어느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깨닫는 순간 또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는 모른다”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늘 말씀과 기도 가운데 풍성히 거함으로 우리의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큰 신비함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삶 속에서 말씀을 온전히 구현하며 살아가는 삶이지요. 앎이 삶이 될 때 우리는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같습니다. 앎이 명사를 넘어서 동사로 살아 움직일 때 우리는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진리를 더 깊이 알아가며 진리가 가져다 주는 자유함을 풍성히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제목 | 성경말씀 | 설교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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